조선 최초 여성 성리학자 - 윤지당 임씨
조선시대는 남성중심 사회였다.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는 딱히 남성중심 사회가 아니었다. 시집살이 보다는 데릴사위가 많고, 유산도 남녀 동등하게 물려주던 남녀평등 사회에 가까웠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 초 유교와 성리학이 나라의 중심 학문으로 자리 잡으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부부유별’, ‘부자유친’ 등의 삼강오륜과 함께 남성을 중시하는 가부장적 사회로 변했다. 그 이념이 지금까지 이어져 우리나라는 조상 대대로 남성중심의 사회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이렇게 지금까지 가부장적인 이념을 갖게 한 지대한 유교의 영향 하에 있었으니 조선시대에 여성 학자는 사실 찾기 힘들다. 교육이나 문학의 영역에서 여성은 배제되어 있었다. 그나마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여성의 글은 언문이나 규방문학, 기녀들의 글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성리학자는 남성만 있었다고 흔히 생각한다. 하지만 조선 여성 성리학자가 있다. 남성의 전유물 성리학에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보인 여성, 바로 윤지당 임씨이다.
그녀는 당대에 이름을 떨친 여성 성리학자였고 일본강점기까지도 계속해서 그 이름이 알려졌던 인물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그녀의 이름은 점차 생소해져 갔다. 그녀의 고향인 원주에서조차 후손이 몰락하여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 그녀의 생애와 글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여성이라는 편견 속에서 학문을 단념하고 여성으로서 규범을 지켜야 했던 시대 속의 슬픔을 딛고 결국은 저서를 남긴 임윤지당을 알아보고 그녀의 글 속 여성의 세계를 살펴보자.
그녀는 당대에 이름을 떨친 여성 성리학자였고 일본강점기까지도 계속해서 그 이름이 알려졌던 인물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그녀의 이름은 점차 생소해져 갔다. 그녀의 고향인 원주에서조차 후손이 몰락하여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 그녀의 생애와 글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여성이라는 편견 속에서 학문을 단념하고 여성으로서 규범을 지켜야 했던 시대 속의 슬픔을 딛고 결국은 저서를 남긴 임윤지당을 알아보고 그녀의 글 속 여성의 세계를 살펴보자.
<임윤지당>
뛰어난 재능이 발휘될 수 없는 현실
조선 후기인 1721년에 출생 한 풍천 임씨에 이름은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알려지지 않았다. 윤지당(允摯堂)은 호로 어린 시절에 그녀의 형제들이 주자의 윤신지(允莘摯)의 말에서 ‘믿음이 두텁고 책임에 정성을 다한다.’는 말에서 따와 불렀다고 한다. 그녀는 대대로 학통을 이어 온 조선 최대 가문 출신이다. 5남 2녀로 사간원 정언을 지낸 큰오빠 임명주(任命周, 1705~1757), 조선후기 대성리학자 임성주(任聖周, 1711~1788), 운호 임정주(任靖周, 1727~1796) 등 모두 재능 있는 선비들이었다. 함흥판관까지 지내던 그녀의 아버지가 여덟살 때 전염병으로 돌아가신다. 결국 그녀는 9살 때 청주 근처 옥화라는 산골 마을로 이사해 둘째 오빠 임성주(任聖周)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일찍이 여동생의 재능을 예사롭지 않음을 간파한 그는 당시 여성들은 접하기 힘든 대학, 논어, 중용 등 유교 경전과 역사서 등을 그녀에게 가르쳤다. 형제들과 경전, 역사, 인물, 정치에 대해 토론을 할 정도로 그녀의 재능은 뛰어났다. 고금의 인물 및 정치의 잘잘못을 논평할 때마다 윤지당이 한마디 말로써 그 시비를 결단하였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논리적이고 뛰어나 형제들은 그녀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애석해 하였다고 한다. 더위에 허덕이는 동생을 보고 "정신을 집중해서 책을 읽으면 가슴에서 자연히 서늘한 기운이 생기는데, 부채질할 이유가 있겠는가? 너희들이 아직도 헛된 독서를 면치 못했구나."라고 할 정도로 그녀가 학문에 몰입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남자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기 때문에 글공부를 해도 쓸모가 없었다. 결국 경전은 그녀에게 어른을 공경하고 정숙하게 행동하며 여성으로서 남편을 잘 부양하는 등의 규범만 요구할 뿐이었다.
남편도 죽고, 아이도 잃고 굴곡진 삶의 역경
결국 그렇게 그녀는 재능을 발휘할 기회도 없이 1739년 19세 되던 해에 원주에 사는 명문가의 선비 신광유(申光裕, 1722~1747)에게 시집을 간다. 그러나 8년 만에 남편이 죽고, 난산 끝에 낳은 어린 아이마저도 결국 사망해 슬하에 자식도 없이 살아간다. 결국 그녀는 양자였던 남편의 두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아가며 학문을 그만둔다.
여성이 할 수 없다는 제문을 지어 세상의 편견을 깨
그녀는 만년에 다시 학문을 시작해 독서와 저술에 힘쓴다. 그녀가 죽은 후 동생이 엮은 그녀의 유고집에는 학문을 잊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성리학이란 학문이 있음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고기 맛이 입을 즐겁게 하듯이 학문을 좋아하여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에 감히 아녀자의 분수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경전에 기록된 것과 성현의 교훈을 마음을 다해 탐구하였다.”
이렇게 조선시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성리학을 여성의 시각으로 연구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큰 오빠 임명주(任命周)가 세상을 떠나자 한문으로 제문을 지음으로써 여성은 학문을 할 수 없다는 남성들의 편견을 깨부수었다.
죽음 후에도 남은 “윤지당유고”
학무과 함께하다 그녀는 1793년 원주에서 7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죽은 뒤 유고 40여 편이 수습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경전 연구와 성리설에 관한 논설 및 중국 역대 위인ㆍ영웅ㆍ학자들에 대한 인물 논평들이다. 이를 그녀가 작고한 지 3년 뒤인 1796년(정조 20) 친정 동생 임정주(任靖周)와 시동생 신광우(申光祐)가 유고(遺稿)를 정리 《윤지당유고》 2권을 간행한다.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는 이 책은 조선시대에 최초로 여성의 시각으로 성리학을 논한 윤지당의 독특한 사상을 집약해 놓은 가치 있는 책이다.
조선 후기인 1721년에 출생 한 풍천 임씨에 이름은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알려지지 않았다. 윤지당(允摯堂)은 호로 어린 시절에 그녀의 형제들이 주자의 윤신지(允莘摯)의 말에서 ‘믿음이 두텁고 책임에 정성을 다한다.’는 말에서 따와 불렀다고 한다. 그녀는 대대로 학통을 이어 온 조선 최대 가문 출신이다. 5남 2녀로 사간원 정언을 지낸 큰오빠 임명주(任命周, 1705~1757), 조선후기 대성리학자 임성주(任聖周, 1711~1788), 운호 임정주(任靖周, 1727~1796) 등 모두 재능 있는 선비들이었다. 함흥판관까지 지내던 그녀의 아버지가 여덟살 때 전염병으로 돌아가신다. 결국 그녀는 9살 때 청주 근처 옥화라는 산골 마을로 이사해 둘째 오빠 임성주(任聖周)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일찍이 여동생의 재능을 예사롭지 않음을 간파한 그는 당시 여성들은 접하기 힘든 대학, 논어, 중용 등 유교 경전과 역사서 등을 그녀에게 가르쳤다. 형제들과 경전, 역사, 인물, 정치에 대해 토론을 할 정도로 그녀의 재능은 뛰어났다. 고금의 인물 및 정치의 잘잘못을 논평할 때마다 윤지당이 한마디 말로써 그 시비를 결단하였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논리적이고 뛰어나 형제들은 그녀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애석해 하였다고 한다. 더위에 허덕이는 동생을 보고 "정신을 집중해서 책을 읽으면 가슴에서 자연히 서늘한 기운이 생기는데, 부채질할 이유가 있겠는가? 너희들이 아직도 헛된 독서를 면치 못했구나."라고 할 정도로 그녀가 학문에 몰입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남자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기 때문에 글공부를 해도 쓸모가 없었다. 결국 경전은 그녀에게 어른을 공경하고 정숙하게 행동하며 여성으로서 남편을 잘 부양하는 등의 규범만 요구할 뿐이었다.
남편도 죽고, 아이도 잃고 굴곡진 삶의 역경
결국 그렇게 그녀는 재능을 발휘할 기회도 없이 1739년 19세 되던 해에 원주에 사는 명문가의 선비 신광유(申光裕, 1722~1747)에게 시집을 간다. 그러나 8년 만에 남편이 죽고, 난산 끝에 낳은 어린 아이마저도 결국 사망해 슬하에 자식도 없이 살아간다. 결국 그녀는 양자였던 남편의 두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아가며 학문을 그만둔다.
여성이 할 수 없다는 제문을 지어 세상의 편견을 깨
그녀는 만년에 다시 학문을 시작해 독서와 저술에 힘쓴다. 그녀가 죽은 후 동생이 엮은 그녀의 유고집에는 학문을 잊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성리학이란 학문이 있음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고기 맛이 입을 즐겁게 하듯이 학문을 좋아하여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이에 감히 아녀자의 분수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경전에 기록된 것과 성현의 교훈을 마음을 다해 탐구하였다.”
이렇게 조선시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성리학을 여성의 시각으로 연구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큰 오빠 임명주(任命周)가 세상을 떠나자 한문으로 제문을 지음으로써 여성은 학문을 할 수 없다는 남성들의 편견을 깨부수었다.
죽음 후에도 남은 “윤지당유고”
학무과 함께하다 그녀는 1793년 원주에서 7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죽은 뒤 유고 40여 편이 수습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경전 연구와 성리설에 관한 논설 및 중국 역대 위인ㆍ영웅ㆍ학자들에 대한 인물 논평들이다. 이를 그녀가 작고한 지 3년 뒤인 1796년(정조 20) 친정 동생 임정주(任靖周)와 시동생 신광우(申光祐)가 유고(遺稿)를 정리 《윤지당유고》 2권을 간행한다.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는 이 책은 조선시대에 최초로 여성의 시각으로 성리학을 논한 윤지당의 독특한 사상을 집약해 놓은 가치 있는 책이다.
<윤지당유고>
그녀의 성리학 속 평등한 남녀
“내 비록 부인의 몸이긴 하지만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은 애초 남녀 차이가 없다. 남자와 여자는 그 행하는 바에 있어서 다르지만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하늘로부터 남녀는 같은 본성을 부여받고, 결국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이 달라 남녀가 달라졌다는 그녀의 주장은 그 시대에는 생각하기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글로서 표현한 그녀의 용기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윤지당유고 ‘언행론’에 “남자의 도는 씩씩한 것이고, 여자의 도는 순종하는 것이니 각기 그 법칙이 있다. 성녀 태사와 성인 문왕의 행적이 다른 것은 서로의 분수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타고난 성품대로 최선을 다한 것은 그 이치가 같기 때문이다. 두 분의 처지를 바꾸어 놓았더라면 역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라고 제시한다. 결국 그녀는 인격의 실현과 심성 수련을 통해 남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시대 여성 지식인은 흔치 않았다. 그나마 글을 쓰는 여성들도 개인적 슬픔, 정서, 사랑 등을 노래했다. 이 때 윤지당임씨는 유교경전과 유학자들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여성이 글을 아는 것 자체를 꺼리고, 숨기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던 조선시대에 성리학에 대해 탁월한 지식과 이해력을 지니고 더 나아가 발전적인 사상을 제시한 윤지당 임씨. 남자와 여자의 존재를 차별에 두지 않고 음양오행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인식한 그녀. 여성 선구자는 서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더 열악했던 우리 조선시대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내 비록 부인의 몸이긴 하지만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은 애초 남녀 차이가 없다. 남자와 여자는 그 행하는 바에 있어서 다르지만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하늘로부터 남녀는 같은 본성을 부여받고, 결국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이 달라 남녀가 달라졌다는 그녀의 주장은 그 시대에는 생각하기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글로서 표현한 그녀의 용기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윤지당유고 ‘언행론’에 “남자의 도는 씩씩한 것이고, 여자의 도는 순종하는 것이니 각기 그 법칙이 있다. 성녀 태사와 성인 문왕의 행적이 다른 것은 서로의 분수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타고난 성품대로 최선을 다한 것은 그 이치가 같기 때문이다. 두 분의 처지를 바꾸어 놓았더라면 역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라고 제시한다. 결국 그녀는 인격의 실현과 심성 수련을 통해 남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조선시대 여성 지식인은 흔치 않았다. 그나마 글을 쓰는 여성들도 개인적 슬픔, 정서, 사랑 등을 노래했다. 이 때 윤지당임씨는 유교경전과 유학자들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여성이 글을 아는 것 자체를 꺼리고, 숨기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던 조선시대에 성리학에 대해 탁월한 지식과 이해력을 지니고 더 나아가 발전적인 사상을 제시한 윤지당 임씨. 남자와 여자의 존재를 차별에 두지 않고 음양오행의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인식한 그녀. 여성 선구자는 서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더 열악했던 우리 조선시대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http://www.women.go.kr/new_women/women/common/bbs/view.do?menuId=M00164&selectedSeq=107126
글 김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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